현실에서의 신의 역할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현실 세계를 설명해주는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역할이다. 우선 신은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누구인지, 왜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는지 왜 어떤 사람은 잘살고 어떤 사람은 못사는지, 신은 모든 현실의 물음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다.다음으로 신은 사후 세계를 주관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의 삶은 유한하고 짧다. 그런데 죽음 이후의 삶은 현실에서의 죗값에 따라 신에 의해 영원히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짧은 삶은 고통스럽고 힘들지라도 참고 견딜 만한 것이다. 나를 힘들게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은 사후에 신이 대신 처벌해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 처벌이자 평가자인 신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부르주아가 왕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왕의 권위를 정당화해주는 신부터 극복해야 한다. 다신 말해 신의 역할을 대신해줄 만한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르주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역할을 완변하게 대체했다. 이성은 신이 독점했던 두 가지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었다. 우선 이성은 현실의 물음에 답을 준다. 우리는 전화를 통해 여기에 왔으며 다른 생물종들과 다르지 않은 생물학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땅에 발 딛고 사는 것은 중력이라는 힘 때문이고,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중력은 만유인력의 다른 표현인데, 만유인력은 우주 전체의 작동 원리이다. 이렇게 이성은 신을 배제하고도 현실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다음으로 이성은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사후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과 정신에 대해 말할 수 있어도 영혼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경험적 근거가 없는 비과학적인 태도이고, 종교의 환상에 젖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없으므로 사후도 없다. 죽음은 신체 기능의 정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부르주아는 왕을 정당화하는 신을 대신해 자신들을 정당화해주는 이성을 성공적으로 세계에 입성시켰다. 같은 맥락에서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으로 사회가 자신들의 계약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는 사회계약설을 지지했다. 이것은 신의 냄새가 남아 있는 왕권신수설을 대체하는 신없이 사회를 설명하는 방법이었다. 이제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스스로가 된 것이다. 대치 구조가 명확해졌다. 구권력인 왕과 영주들은 장원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하고 종교로부터 지배의 정당성을 얻었다. 반면 신권력인 부르주아들은 공장과 상업을 생산수단으로 소유하고, 이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얻었다.

 

예상대로 일이 터졌다. 두 권력은 충동하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권력이 승리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에 대해 알아보면서 개별적인 사건을 알아보는 대신에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할 만한 사건이므로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인류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왕이라는 존재의 지배를 받아왔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이 문제시되지 않았다. 평등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한 채 인류는 존재해온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문제라는 것, 따라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표출되었는데,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인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 등장했다. 왕이 있는 세계에서 자유인이라 왕 혼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왕을 몰아낸 프랑스 대혁명은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부르주아는 더 이상 지배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다.

 

A는 단두대로 걸음을 옮겼다.A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민중들은 환호하기 시작했다. 따가운 햇살과 환호 소리로A는 정신이 없었다. 신으로부터 권한을 받았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는 했으나, 기도하지 않은 지는 오래됐고 신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많지 않았다. 사실 성직자들을 보호해주면서 알게 된 그들의 권력욕은 마음으로나마 교회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B는 환호하는 군중들 속에 섞여 있었다. 저 멀리 A의 머리가 단두대에 거리는 것이 보였다.B의 마음은 복잡했다. 사교계에서 많은 학자와 친분을 쌓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해주기도 했지만,B는그들의 무신론적인 말들이 어쩐지 찜찜했다. 무신론자들과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저 멀리 신과 가장 가까울 것 같은 A가 단두대에 목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곧 높이 오른 단두대의 칼이 쏜살같이 밑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높아졌으며 B는 충격적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군중들과 함께 소리를 질렀다. 왕이 죽는 순간인 동시에 신이 죽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중세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