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이 세분화 되는 중세 봉건제사회>
중세 봉건사회는 4세기부터 14세기 무렵까지 약 천 년 정도의 시기이다. 중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고대 노예제사회 말기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한 사건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400년 동안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우리가 21세기에 살소 있고 방금 1세기부터 4세기까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도대체 세기를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 정해진 것인가? 그것은 잘 알려진 대로 예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의 탄생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예수의 탄생을 1년으로 1세기의 시작으로 결정한 것이다. 역사적 사료상으로 고려하면 1년이 정말 예수가 탄생한 때인지는 아직까지도 의심스럽다고 하며, 역사가들은 기원전 4년에서 기원후 6년 사이에 예수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몇 년에 태어났는지의 문제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몇 년에 태어났는지 불명확한 예수라는 인물의 영향력이다.
도대체 생전에 무슨 일을 했기에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되는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인가? 그리스도교가 아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친숙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서구 중심이기 때문에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근현대 시기의 동양은 항상 지배받고 교화되어야 하는 식민지의 입장에 놓여 있었다. 세계의 주인공은 안타깝게도 서양인임이 분명한것이다. 현재 중국이 떠오르고 있고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겨를 것이라는 분위기를 동아시아를 뜨겁게 달구고 있지만 중국의 변방에 붙어 있는 한국에서는 아직도 취업을 위해 영어를 공부하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서구에서 들어온 종교인 기독교와 천주교를 믿고 TV나 잡지 광고의 이상적인 모델로 서구인이 등장하는 것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감상한다.
이러한 서구의 영향력이 문제인지 아닌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로서으 서구의 영향력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근대와 현대의 세계는 서구의 세계였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세계의 역사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당연히 서구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서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와 종교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 서구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관통하는 근원적인 배경은 크게 두가지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그것이다.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 로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역사적 사조로서, 우리가 그리스 로마신화라고 하면 떠오르는 제우스나 아폴론 등의 다신의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반면 헤브라이즘은 이스라엘 밀족과 야훼나 여호와라고 불리는 유일신인 하나님과의 계약에 대한 역사적 흐름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말한다. 쉽게 정리하면 서구는 두가지 문화를 뿌리로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그리스도교. 만약 우리가 세계의 역사에 대해 이해하려면 서구에 대해 이해해야 하고, 서구 사회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교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중세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리스도교의 핵심 인물인 예수와 유대인들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1세기가 되면 이스라엘 나사렛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예수라는 인물이 성장한다. 이 시기의 이스라엘 민족은 거대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이때의 로마는 지중해를 바탕으로 세계에 페권을 행사하는 제국으로서 현대의 미국의 영향력에 버금가는 국가였다. 반면 이스라엘 민족은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았고, 문화적으로는 신과의 계약인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교의 문화를 독자적으로 형성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유대교는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종교였다. 그리고 예수는 이러한 식민지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다.
이후 장성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유대교의 유일신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복음을 전파하러 이스라엘 지역을 떠돌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교의 신학자들이었던 율법학자드의 율법 이해와 충돌했다. 왜냐하면 예수는 형식화된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판단은 인정과 거부의 양극단으로 나위었다. 그러던 중 예수는 반대자들의 고소와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유다의 변졀로 잡혀갔고, 로마의 유대 지역 집정관인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이 시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치안 유지는 로마가 하고 있었다.
빌라도 앞에 끌려온 예수는 풀려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유대 민족의 풍습 중에 과워절이 있는데, 이날에는 죄수 중 한 명을 풀어주는 풍습이었다. 고소가 접수되어서 잡아오기는 했지만 빌라도는 예수의 남다른 포스를 보고 처형하기가 껄끄러워졌다. 중동 지역에 살고 있는데도 북부 유렵인처럼 하얀 피부 하며 길고 부드러운 갈색머리에 파란 눈동자까지 게다가 머리 뒤에는 후광도 있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중세 회화의 영향이 큰데, 중세 회화에서 예수가 북부 유럽인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유럽지역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남다른 포스의 얘수와 강도를 바라바를 두고 유대인들이 선택하게 했다. 유대인들이 워하는 한명을 살려주겠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라바의 석방을 선택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으로 볼 때, 어쩌면 적절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바라바는 이스라엘민족을 통치하는 로마에 저항해서 폭동을 주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는 바라바는 독립운동가 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정체 불분명한 예수보다는 현실적으로 민족을 대변하는 바라바가 더 필요해 보였을 것이다. 결국 잘 알려진 대로,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생을 마감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흩어진 제자들을 모아 초기 그리스도교의 기반을 닦에 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지하 무덤이면서 동굴인 카타콤에서 비밀스럽에 예배를 이어갔다.
하지만 로마의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박해의 대상이었던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로마의 국교로 정립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쉽지 않을 인인데 마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서는 식민지 민족의 종교인 무속신앙을 일본의 국교로 인정한 것과 다를바 없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발생한 그리스도교는 세계적인 제국인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유럽 전체로 그 영향력을 뻗어 나가게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중세 봉건제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다시A와B의 사회로 돌아와 보면 원시 공산사회를 지나 고대 노예제사회가 되면서 변화되었던 가장 큰 특징은 토지와 영토라는 생산수단이 왕에 의해서 독점되었고 이로 인해 계급이 분화되고 정착되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지배자인 왕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신이 신이라고 하였고 중세 봉건제사회가 되면 사회적 계급은 더 다양하고 복잡하게 분화된다. 국왕과 노예 사이에 성직자, 영주, 귀족, 기사, 농노, 노예가 생긴다.
이 중에서 중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계급은 영주 계급이다. 영주는 성의 주인으로서 성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해당하는 장원을 소유하고 있었다. 장원은 쉽게 말하면 영주의 사유지이다. 고대의 토지와 비교할때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한다면, 장원은 직접적으로 영주의 영향권에 놓인 까닭에 장원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산물은 영주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즉, 장원은 영주의 생산수단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생산수단을 소유하면 생산물을 수유하게 되고 이로써,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러 영주들이 한명의 국왕 아래에 있었지만, 영주가 생산하는 사적으로 소유한 이상 실질적인 권력은 영주에게 속했다. 그래서 영주들 간에는 끊임없이 권력 싸움에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더 많은 권력을 위해서는 서로의 영토가 필요했다. 게다가 이러한 분쟁을 조율해줄 절대적 권력이 존재하지 못해서 영주들 간에 전쟁이 빈번해지자, 영주들은 자신의 장원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벽이 두껍고 높은 성이 있어야 적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서 중세 시대를 거친 사회는 성을 소유하게 되었고 중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장원을 소유한 영주들이 끝없이 싸우면서 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에는 성이 있는 것은 그들이 중세를 거쳤기 때문이다. 반면 영주들에 의해 지방으로 권력이 분산되지 않고 국왕 중심의 집권적 체제를 유지했던 한반도에는 거대한 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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