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대공황-2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다양한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우리는 대표적인 세 국가의 대공황 극복 방안을 살펴보려 한다. 새 국가는 미국, 러시아, 독일이다. 우선 미국은 뉴딜정책을 시행한다. 뉴딜정책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가 시행한 경제정책으로 국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자유 시장의 문제점을 해소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즉 공급과잉이라는 자본주의 내적 문제점을 정부가 인위적인 개입으로 조절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해결 방식을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수정한다는 의미에서 "수정 자본주의" 혹은 앞선 초기자본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후기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구체적을 미국은 경기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댐 건설 등의 공공사업을 추진한다. 그런데 경기침체를 극복하려는데 왜 갑자기 댐을 건설하는가? 사실 미국은 댐이 더 생긴다고 해서 침체된 경기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댐이 목적이 아니라 댐을 건설하는 과정이 목적이다. 댐을 건설하려면 노동자가 임금을 받으면 생필품을 사게 되고, 사회 전반에 수요가 창출된다. 수요가 생기면 기업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멈춰 있던 공장을 다시 가동할 것이다.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필요하고, 다시 고용이 활성화되어 노동자들의 소득이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다시 사회 전체적으로 소비가 촉진될 것이다. 실제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수정 자본주의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다. 미국의 경기는 차츰 회복된다. 러시아는 자본주의를 수정한 미국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공급과잉이라는 문제점을 내포한 자본주의를 폐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어차피 자연스럽게 붕괴될 것이므로 미리 자본주의를 폐기한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자본주의 대신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으로 명칭을 전환했다. 그런데 사실 러시아가 공산주의로 돌아선 것은 1929년 대공황 이후가 아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었다. 러시아는 대공황 이전에 자본주의를 폐기한것이다. 그래서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대공황으로 경기침체를 경험하던 시기에, 반대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안정적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마지막으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고 있는 중에, 성상가상으로 대공황까지 겹치자 국가적 파산에 직면했다. 마르크화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수레에 마르크화를 가득 싣고 가더라도 빵을 사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국민들의 고통과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때 바로 히틀러가 나타났다. 히틀러는 독일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전쟁배상금 때문임을 밝히고, 자신이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며 독일인들을 선동했다. 그리고 위대한 독일 민족이 이렇게 초라해진 원인에 대해 철학적 견해도 제시했는데, 그것은 독일 민족이 살고 있는 땅이 너무나 좁다는 것이었다. 각 민족은 자신의 민족성에 어울리는 영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영토는 곧 민족의 영혼과 직결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의 독일 영토는 세계대전 이후 다른 국가들에 의해서 더 좁아졌으며 독일 민족의 영토가 심하게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영토가 오염되면서 위대한 독일 민족의 영혼이 고통 받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오염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한 것이 독일 영토에 살고 있는 저열한 유대인들이었다. 독일 민족의 위대한 부활을 위해, 영토를 순결하게 청소한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 대학살인 " 홀로코스트" 가 시작되었다.

 

 

유렵에서의 유대인의 지위를 먼저 알아보자면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으며 신과의 계약인 율법에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유대 민족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한 일물인 나사렛 예수가 탄생했다. 예수는 유대교의 율법을 따르지 않아 유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그러다가 로마에 잡혀갔고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섰다. 빌라도가 예수와 바라바 중 하면을 살려주겠다며 우대인들에게 선태하게 하자,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했다.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처형되었고 하늘로 올라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뜻인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한 후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400년 후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로마의 국교로 정하면서 이후 유럽 사회는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예수를 죽인 직접적인 피의자는 유대민족인 것이다. 문제는 이후 서구 유럽 사회가 그리스도교의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의 정치, 사회적 지위는 좋지 못했다. 범죄를 저지른 민족이라는 취급을 받은 것이었다. 자신의 국가를 갖지도 못했으며 여러 국가에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다른 민족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나라가 없으니 농사를 지을 땅도 없었다. 그래서 유대인은 어쩔 수 없이 중세 기간 동안 가장 천시되던 상업과 대부업에 종사했다. 그런데 근대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상업과 대부업은 무역과 금융업이 되었고, 유대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지금까지도 세계적 금융 산업은 유대 자본의 의해 움직인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독일 민족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독일 민족의 성스러운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아까 위에서 언급했다. 유대인의 그리스도를 죽인 야비한 민족이며, 독일이 전쟁배상금으로 허덕일 때도 금융 산업을 바탕으로 부유하게 살아가는 얄미운놈들이며 외모에 있어서도 유대인은 미묘하게 동양적이라고 말했다. 독일인들은 전 우주적 범죄를 저질렀던 유대 민족을 처단하고 성스러운 독일을 재건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따라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인종 청소를 감행했다. 여기까지는 명분이고, 실제로 유대인을 학살해야 했던 실질적 이유는 아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고 민중을 선동했다. 그 결과 독일민족사회주의 정당인 나치당이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로 집권당이 되었다. 일단 집권은 하긴 했는데, 히틀러는 고민에 빠졌다. 민중들에게 전쟁배상금을 물지 않게 하겠다고 장담했지만 영국, 프랑스와 다시 협상하기에도 힘이들었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다시 전쟁을 해서 승리를 하자는 것이었다. 승리를 하면 배상금을 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전쟁을 할려고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물자도 있어야 하고 무기도 사야하고, 독인은 경제공황과 배상금 때문에 재정이 충분하지 못했다. 히틀러가 고민해서 떠오른 것이 세계적 금융과 사업으로 부유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전쟁을 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재산을 몰수하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고, 독일인들도 쉽게 수긍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떠올린것이 앞에서 언금했던 이야기이며 히틀러가 민족성과 영토를 연결한 이유이기도 했다. 위대한 민족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성스러운 영토가 필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이 생각은 독일 민족에게 먹혀들었으며 독일인들은 열광을했다.

 

 

전쟁배상금과 대공황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당을 중심으로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결집하며, 차근차근 전쟁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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